아와국 (난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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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와국은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도쿠시마현에 해당한다. 고대에는 조 생산지로 '아와쿠니'로 불렸으며, 713년 지명이 두 글자로 표기되면서 '아와'로 변경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사사키 씨와 오가사와라 씨가 슈고를 맡았고, 센고쿠 시대에는 미요시 씨가 세력을 확장하여 기나이 지방을 지배하며 미요시 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초소카베 모토치카가 시코쿠를 통일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로 하치스카 씨가 아와 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도쿠시마 번이 설치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메이토 현이 되었다가 도쿠시마 현으로 변경되었다. 아와 국에는 국부, 국분사, 신사 등의 시설이 있었으며, 오오마히코 신사가 일궁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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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와국 (난카이도) - 아와오도리
아와오도리는 일본의 전통 춤으로, 여름 축제에서 공연되며 불교, 가마쿠라 시대 춤, 추수 감사 춤 등에서 유래되었고, 도쿠시마에서 16세기부터 성대하게 열렸으며, 남녀 춤 스타일과 다양한 악기, 노래가 특징이다. - 아와국 (난카이도) - 이치노미야성 (도쿠시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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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시마번은 1585년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초대 번주가 되어 아와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으며, 오사카 전투 이후 아와지국을 추가로 영유하여 25만 7천 석 규모로 성장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도쿠시마현이 되었다. - 도쿠시마현의 역사 - 아키즈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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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지국은 난카이도에 속했던 일본의 옛 구니로, 현재 효고현 아와지섬에 해당하며, 일본 열도 최초로 생겨난 섬으로 기록되어 있고, 율령제 하에서는 미케쓰쿠니로서 해산물을 바쳤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미요시씨와 도요토미 정권의 지배를 거쳐 에도 시대에는 도쿠시마번 하치스카씨가 통치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효고현에 편입되었다.
아와국 (난카이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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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국명 | 아와국 |
로마자 표기 | Awa-no kuni |
한자 표기 | 阿波国 |
별칭 | 아슈 |
로마자 표기 (별칭) | Ashū |
소속 | 남해도 |
현재 위치 | 도쿠시마현 |
국력 | 상국 |
거리 | 중국 |
군 | 9군 45향 |
국부 | 도쿠시마시 |
국분사 | 아와국분사터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
국분니사 | 아와국분니사터 (도쿠시마현 묘자이군이시이정) |
일궁 | 야쿠라히메 신사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가미이치노미야 오아와 신사 (도쿠시마현 묘자이군가미야마정) 이치노미야 신사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 오아사히코 신사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
추가 정보 | |
아와국 | 도쿠시마현에 있었던 영제국 |
아슈 | 지바현 남부에 있었던 영제국, 후에 아와국의 서부가 된 지역, 아와국조가 지배한 지역 |
2. 명칭과 유래
고대에는 현재 도쿠시마현 북부가 조 생산지였기 때문에 '아와국(粟国)'으로 불렸다. 남부 지역은 '나가국(長国)'이라고 불렸다. 『고고습유(古語拾遺)』에 따르면, 신무동정(神武東征) 때 이미베씨(忌部氏)를 이끌고 온 아마노토미노미코토(天富命)가 이곳을 개척하고 곡물과 삼씨를 심었다고 한다.[3]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사사키씨, 오가사와라씨가 슈고를 맡았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삼관령가 중 하나인 호소카와씨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전국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오가사와라씨의 서류인 미요시씨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미요시씨는 미요시 노리나가와 미요시 모토나가 시대에 교토로 진출하여 관령 호소카와씨의 중신으로서 아와를 근거지로 키나이에서 권세를 휘둘렀다.
율령제 하에서 나가국을 포함하여 아와국(阿波国)이 성립되었다. 와도(和銅) 6년(713년)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의 명으로 지명이 두 글자로 표기되면서 '粟'에서 '阿波'로 변경되었다.
같은 발음의 안방국(安房国)은 아와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개척한 곳이라는 설이 『고고습유』에 있다.
3. 연혁
1540년대에 미요시씨는 미요시 나가요시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나가요시의 차남인 미요시 요시카타가 아와를, 삼남 아타케 후유야스가 아와지를, 막내 소가 가즈나리가 사누키를 다스리고, 나가요시 자신은 교토의 막부에서 관령대(管領代)로서 중앙 정치에 참여했다. 본국인 아와 외에 동생들이 다스리는 사누키, 아와지, 더 나아가 이즈미, 셋쓰, 가와치, 야마시로, 야마토, 단바에 더해 와카사, 하리마 일부까지 지배하에 두어 미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561년에 가즈나리가 급사하고, 1562년에 요시카타가 전사했으며, 1563년에 나가요시의 적장자(嫡男)로 장래가 유망했던 미요시 요시오키마저 병사하자, 나가요시는 정신적으로 쇠약해졌다. 1564년에는 아타케 후유야스가 나가요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이유는 불명), 나가요시 자신도 동생들과 아들의 뒤를 이어 같은 해 병사한다.
가독(家督)을 계승한 미요시 요시쓰구는 이이모리 산성과 와카에 성을 근거지로 세력을 유지하려 하지만, 미요시 삼인중과 중신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의 주도권 쟁탈에 의한 내분으로 미요시씨는 약화되었다. 1573년, 교토에서 추방된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호한 요시쓰구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와카에성에서 멸망한다.
이후 미요시씨의 적류는 단절되고, 살아남은 요시카타의 적장자인 아와 미요시가(阿波三好家)의 미요시 나가하루가 본국인 아와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나가하루는 아와 전토의 국인(國人)과 영민(領民)에게 법화종을 강요하여 지지를 잃었고, 토사국의 조소카베씨의 침공을 받아 1584년 아와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1585년에는 사누키, 이요도 손에 넣어 시코쿠 통일을 달성한다.
그러나 그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코쿠 정벌을 실시한다. 1585년 6월, 하시바 히데나가를 총대장으로 하는 10만 군세가 시코쿠로 보내지고, 히데나가, 하시바 히데쓰구 등의 군대는 아와에서 상륙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는 사누키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이요로 다방면에서 시코쿠를 공격했다. 모토치카는 2만에서 4만의 군대로 아와의 시라치 성을 근거지로 대항했지만, 준비 부족과 병력 차이로 하시바군 상륙 2개월 후 항복했다. 모토치카는 토사 일국만을 안도받고, 토사 이외의 3개국은 몰수되었다.
이후 하치스카씨 하치스카 마사카쓰에게 아와국과 아와지국을 주려 했으나 고사하여, 아들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아와에 봉해진다. 마사카쓰와 의형제를 맺은 이나다 우에모토를 객장(客將)으로 맞이하여 아와지국과 현 북부를 영지로 맡겼다. 하치스카씨는 에도 시대를 통해 아와국 도쿠시마 번・후타다번(도쿠시마 번 지번), 그리고 아와지국의 국주로서 아와・아와지의 두 나라를 다스렸지만, 차츰 이나다 씨를 가신으로 대우하게 되고 이나다 씨에서는 독립을 향한 분위기가 높아지게 되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이 실시되면서 아와는 메이토 현이 되었다. 메이토 현은 아와지 국(아와지 섬)도 범위로 하고 있었고, 1873년 2월 20일에는 가가와 현도 편입했다. 그러나 제2차 부현 통합에 의해, 1875년 9월 5일에 구 사누키 국 부분이 가가와 현으로 분리되고, 1876년 8월 21일에 경오사변에서 적대했던 아와지 국은 효고 현에 편입되고, 아와 국 부분은 고치 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결국 1880년에 구 메이토 현이 고치 현에서 분리되어 현재의 도쿠시마 현이 발족했다. 시코쿠의 각국은 거의 구국의 형태 그대로 현으로 이행했다.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 이후 아와 국의 행정 구역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날짜 사건 1871년 7월 14일 (8월 29일) 폐번치현에 의해 도쿠시마 현(제1차) 관할이 됨. 1871년 11월 15일 (12월 26일) 제1차 부현 통합으로 메이토 현 관할이 됨. 1876년 8월 21일 제2차 부현 통합으로 고치 현 관할이 됨. 1880년 3월 2일 도쿠시마 현(제2차) 관할이 됨.
3. 1. 고대
구석기 시대부터 아와에 사람이 거주했으며, 특히 비옥한 요시노 강(吉野川) 유역에서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의 유적과 고분이 발견되었다. 『고고습유』에 따르면, 이 지방의 이름은 원래 "粟国"으로 쓰였으며, 조 생산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3] 『구사기』에 따르면 아와의 국조는 다카미무스비의 9대손으로 오진 천황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한다.
713년, 겐메이 천황은 지방 명칭 규칙이 『율령』에 따라 두 글자의 한자로 표준화됨에 따라 이 지방의 이름을 "阿波"로 변경하였다.
참고로, 같은 발음의 아와국(安房国)은 아와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개척한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고고습유』에 있다.
3. 2.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사사키씨(佐々木氏),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가 슈고를 맡았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삼관령가 중 하나인 호소카와씨(細川氏)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전국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오가사와라씨의 서류인 미요시씨(三好氏)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미요시씨는 三好之長와 三好元長 시대에 교토로 진출하여 관령 호소카와씨의 중신으로서 아와(阿波)를 근거지로 키나이(畿内)에서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
1540년대에 미요시씨는 三好長慶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나가요시의 차남인 三好義賢가 아와를, 삼남 安宅冬康가 아와지를, 막내 十河一存가 사누키를 다스리고, 나가요시 자신은 교토의 막부에서 관령대(管領代)로서 중앙 정치에 참여하여, 본국인 아와 외에 동생들이 다스리는 사누키, 아와지, 더 나아가 이즈미(和泉), 셋쓰(摂津), 가와치(河内), 야마시로(山城), 야마토(大和), 단바(丹波)에 더해 와카사(若狭), 하리마(播磨) 일부까지 지배하에 두어 미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561년에 가즈나리가 급사하고, 1562년에 요시카타가 전사했으며, 1563년에 나가요시의 적장자(嫡男)로 장래가 유망했던 三好義興마저 병사하자, 나가요시는 정신적으로 쇠약해졌다.
1564년에는 安宅冬康가 나가요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이유는 불명), 나가요시 자신도 동생들과 아들의 뒤를 이어 같은 해 병사한다.
가독(家督)을 계승한 三好義継는 飯盛山城과 若江城을 근거지로 세력을 유지하려 하지만, 미요시 삼인중과 중신 松永久秀 등의 주도권 쟁탈에 의한 내분으로 미요시씨는 약화되었다.
1573년, 교토에서 추방된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足利義昭를 보호한 요시쓰구는 織田信長에게 와카에성에서 멸망한다.
이후 미요시씨의 적류는 단절되고, 살아남은 요시카타의 적장자인 아와 미요시가(阿波三好家)의 三好長治가 본국인 아와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나가하루는 아와 전토의 국인(國人)과 영민(領民)에게 법화종을 강요하여 지지를 잃었고, 토사국의 長宗我部氏의 침공을 받아 1584년 아와는 長宗我部元親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1585년에는 사누키, 이요도 손에 넣어 시코쿠 통일을 달성한다.
그러나 그 직후 豊臣秀吉가 四國攻め을 실시한다. 1585년 6월, 羽柴秀長을 총대장으로 하는 10만 군세가 시코쿠로 보내지고, 히데나가, 羽柴秀次 등의 군대는 아와에서 상륙하고, 宇喜多秀家는 사누키로, 小早川隆景는 이요로 다방면에서 시코쿠를 공격했다.
모토치카는 2만에서 4만의 군대로 아와의 白地城을 근거지로 대항했지만, 준비 부족과 병력 차이로 하시바군 상륙 2개월 후 항복했다. 모토치카는 토사 일국만을 安堵받고, 토사 이외의 3개국은 몰수되었다.
이후 蜂須賀氏 正勝에게 아와국과 아와지국을 주려 했으나 고사하여, 아들 蜂須賀家政가 아와에 봉해진다. 마사카쓰와 의형제를 맺은 稲田植元를 객장(客將)으로 맞이하여 아와지국과 현 북부를 영지로 맡겼다. 하치스카씨는 에도 시대를 통해 아와국 徳島藩・후타다번(徳島藩支藩), 그리고 淡路國의 国主로서 아와・아와지의 두 나라를 다스렸다.
3. 3. 근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시코쿠 정벌을 실시하여, 1585년 6월,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를 총대장으로 하는 10만 군세를 시코쿠로 보냈다. 히데나가,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 등의 군대는 아와에 상륙하고,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사누키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이요로 다방면에서 시코쿠를 공격했다.[1]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는 2만에서 4만으로 전해지는 군대를 가지고 아와의 시라치 성(白地城)을 거점으로 대항했지만, 준비 부족과 병력 차이로 인해 하시바 군 상륙 2개월 만에 항복했다. 모토치카는 도사 1국을 안도(安堵)받았지만, 도사 이외의 3개국은 몰수되었다.[1]
이후, 하치스카 씨(蜂須賀氏) 마사카쓰(正勝)에게 아와 국과 아와지 국을 더 주려 했으나 고사했다. 아들인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아와에 봉해졌다. 또 마사카쓰와 의형제의 맹세를 맺은 이나다 우에모토(稲田植元)를 객장(客將)으로 맞이하여 아와지 국과 현 북부를 지행지(知行地)로 맡겼다. 하치스카 씨는 개역(改易)되지 않고, 에도 시대를 통해 아와 국 도쿠시마 번(徳島藩)・후타다 번(徳島藩支藩), 그리고 아와지 국(淡路国)의 국주(国主)로서 아와・아와지의 두 나라를 다스렸지만, 차츰 이나다 씨를 가신으로 대우하게 되고 이나다 씨에서는 독립을 향한 분위기가 높아지게 되었다.[1]
도쿠시마 번(徳島藩)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에게 주어졌지만, 이에마사의 아버지인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正勝)가 고령을 이유로 사양하였기에 이에마사가 아와 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시대에는 하치스카 씨가 도쿠시마 성(徳島城)을 거점으로 아와 국(阿波国)과 아와지 국(淡路国)을 통치했다. 도쿠시마 번은 명목상 고쿠다카(石高)가 25만 7천 석으로 17번째로 큰 번이었다.[1]
명칭 | 씨족 | 유형 | 고쿠다카 |
---|---|---|---|
하치스카 씨 | 도자마 | 257000고쿠 | |
3. 4. 근대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 이후, 아와 국은 메이토 현(名東県)이 되었다가 가가와 현에 병합되었다. 1875년, 사누키 국이 분리되었고, 1876년에는 아와지 국이 효고 현에 배속되었다. 1880년, 아와 국은 고치 현에서 분리되어 도쿠시마 현이 되었다.초기 메이지 시대의 旧高旧領取調帳|규다카큐료토리시라베초일본어 (구고구령취조장), 즉 국가 자원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평가에 따르면, 이 지방에는 총 306,632고쿠를 가진 584개의 마을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 이후 아와 국의 행정 구역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
1871년 7월 14일 (8월 29일) | 폐번치현에 의해 도쿠시마 현(제1차) 관할이 됨. |
1871년 11월 15일 (12월 26일) | 제1차 부현 통합으로 메이토 현 관할이 됨. |
1876년 8월 21일 | 제2차 부현 통합으로 고치 현 관할이 됨. |
1880년 3월 2일 | 도쿠시마 현(제2차) 관할이 됨. |
4. 지역
아와 국은 난카이도에 속하며, 현재의 도쿠시마현에 해당한다.
4. 1. 군(郡)
아와 국에는 다음의 군이 있었다.군 | 고쿠다카 | 현재 | 현재 상황 |
---|---|---|---|
아와 군 | 12667고쿠 | 폐지 | 아와, 요시노가와의 일부 |
이타노 군 | 61892고쿠 | 나루토, 키타지마, 아이즈미, 이타노, 카미이타의 대부분, 도쿠시마의 일부, 요시노가와, 아와의 일부 | |
가이후 군 | 18450고쿠 | 무기, 미나미, 카이요 | |
가쓰우라 군 | 34237고쿠 | 가쓰우라, 카미카쓰, 코마쓰시마의 대부분, 도쿠시마의 일부 | |
미마 군 | 10735고쿠 | 쓰루기, 미마의 대부분, 미요시의 일부 | |
미요시 군 | 22985고쿠 | 히가시미요시, 미요시의 일부 | |
묘도 군 | 38491고쿠 | 사나고치, 도쿠시마의 일부 | |
묘자이 군 | 28718고쿠 | 이시이, 카미야마, 도쿠시마, 카미이타의 일부 | |
나카 군 | 60736고쿠 | 나카, 아난, 코마쓰시마의 일부 | |
오에 군 | 17715고쿠 | 폐지 | 요시노가와의 대부분, 미마의 일부 |
4. 2. 에도 시대의 번(藩)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하치스카 씨가 도쿠시마 성을 거점으로 아와 국(그리고 인근 아와지 국)을 에도 시대 말까지 계속 통치하였다. 도쿠시마 번은 명목상의 고쿠다카가 로 17번째로 큰 번이었다.[1]명칭 | 씨족 | 유형 | 고쿠다카 |
---|---|---|---|
도쿠시마 | 하치스카 씨 | 도자마 | |
5. 시설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대사(大社) 3좌 3사, 소사(小社) 47좌 등 총 50좌가 기록되어 있다. 대사 3사는 다음과 같다. (아와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 이타노군 오오마히코 신사 (나루토시)
- 아사시키군 이마베 신사 - 논사가 여러 곳 있다. 메이지 시대에 도쿠시마시로 옮겨졌다.
- 나가타군 아마이와토베야쿠라히메 신사 - 논사가 여러 곳 있다.
총사(総社)와 일궁(一宮)은 다음과 같다.
- 총사: 고쿠후 하치만 다이묘진궁 (도쿠시마현도쿠시마시고쿠후정 간논지) - '''※ 단, 명확한 증거는 없다.'''
- 일궁
- '''오오마히코 신사'''
-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 (메이세이군 가미야마정)
- '''일궁 신사''' (도쿠시마시일궁정)
- '''야쿠라히메 신사''' (도쿠시마시)
아와국 일궁이라고 하는 신사는 여러 곳 있다. 현재 “아와국 일궁”이라고 하면 오오마히코 신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오오마히코 신사가 일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중세 이후의 일이다. 옛부터 일궁으로 여겨졌던 곳은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메이세이군 가미야마정)였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에서 국부 근처로 분사하여 일궁 신사(도쿠시마시일궁정)가 창건되었다.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와 일궁 신사는 아마이와토베야쿠라히메 신사의 논사이지만, 야쿠라히메 신사(도쿠시마시)도 아마이와토베야쿠라히메 신사의 논사이며, 이곳도 일궁으로 여겨진다. 이마베 신사는 아와국 최고의 사격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시코쿠 일궁”이라고 칭하고 있다.[4]
5. 1. 국부(国府)
국부(国府)는 명방군에 있으며, 현재의 도쿠시마시(徳島市) 국부정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국부 유적 관련 발굴 조사가 현재까지 30회 이상 실시되었다. 그 결과 국아(国衙) 관련 시설들은 구불구불 흐르는 여러 개의 강에 의해 분단된 약간 높은 지대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래전에는 7세기 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으며, 새로운 것은 12세기까지 이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5. 2. 국분사(国分寺)・국분니사(国分尼寺)
아와 국분사는 국부의 남쪽에, 국분니사는 국부의 서쪽에 각각 건립되어 있다.[4]5. 3. 신사(神社)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대사(大社) 3좌 3사, 소사(小社) 47좌 등 총 50좌가 기록되어 있다. 대사 3사는 다음과 같다. 아와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이타노군 오오마히코 신사 (나루토시)
- 아사시키군 이마베 신사 - 논사가 여러 곳 있다. 메이지 시대에 도쿠시마시로 옮겨졌다.
- 나가타군 아마이와토베야쿠라히메 신사 - 논사가 여러 곳 있다.
총사(総社)와 일궁(一宮)은 다음과 같다.
- 총사: 고쿠후 하치만 다이묘진궁 (도쿠시마현도쿠시마시고쿠후정 간논지) - '''※ 단, 명확한 증거는 없다.'''
- 일궁
- '''오오마히코 신사'''
-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 (메이세이군 가미야마정)
- '''일궁 신사''' (도쿠시마시일궁정)
- '''야쿠라히메 신사''' (도쿠시마시)
아와국 일궁이라고 하는 신사는 여러 곳 있다. 현재 “아와국 일궁”이라고 하면 오오마히코 신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오오마히코 신사가 일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중세 이후의 일이다. 옛부터 일궁으로 여겨졌던 곳은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메이세이군 가미야마정)였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일궁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에서 국부 근처로 분사하여 일궁 신사(도쿠시마시일궁정)가 창건되었다. 우에이치구 오오아와 신사와 일궁 신사는 식내명신대사인 아마이와토베야쿠라히메 신사의 논사이지만, 야쿠라히메 신사(도쿠시마시)도 아마이와토베야쿠라히메 신사의 논사이며, 이곳도 일궁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마베 신사는 아와국 최고의 사격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시코쿠 일궁”이라고 칭하고 있다.
6. 전투
- 1200년 사사키 쓰네타카(佐々木経高)가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1]
- 1205년 사사키 쓰네타카가 다시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2]
- 1221년 사사키 타카시게(佐々木高重)와 오가사와라 나가키요(小笠原長清)가 각각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3][4]
- 1223년 오가사와라 나가쓰네(小笠原長経)가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 1333년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가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 1572년 상앵성 전투에서는 미요시 나가하루군(소가와 타모쓰 등 7,000명)과 시노하라 나가후사(1,500명)이 전투를 벌였다.
- 1582년 나카토미가와 전투에서는 쵸소카베 모토치카(23,000명)와 미요시군(소가와 타모쓰 등 5,000명)이 전투를 벌였다.
- 1868년 아와 해전에서는 구 막부 해군(에노모토 다케아키:카이요마루)과 사쓰마번 해군(아카츠카 겐로쿠: 카스가마루, 수송선 2척)이 전투를 벌였다.
참조
[1]
서적
Awa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
서적
Awa no Kuni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3]
문서
그 군의 이름은 마식군이 되고, 더욱 아와이부를 나누어 동국에 이끌고 방총의 개척을 하여, 이 때문에 현재의 도쿠시마현과, 와카야마현, 지바현에 공통되는 지명이 많다.
[4]
서적
古代国家への胎動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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